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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과 박지원

by widestory 2025.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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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시대의 실학자 정약용과 박지원에 대해서, 이번 글에서는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활동한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과 박지원, 그리고 그들이 남긴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의 차이와 실학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과 박지원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과 박지원

 

정조 시대의 정치적 배경과 실학의 태동

조선 후기 실학은 정조(재위 1776~1800년) 시기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정조는 당쟁에 지친 정국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개혁적인 학문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규장각 설치, 초계문신제 운영, 탕평책 실현 등이 있었고, 이는 실학자들이 정책 입안과 행정 실무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습니다. 정조는 특히 서얼 출신이나 지방 출신 학자들에게도 활발한 등용 기회를 주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었습니다. 또한 한양의 기득권층과 거리를 둔 중국 북경 유학 경험자들, 즉 북학파 실학자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배경도 정조의 개혁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의 실학은 이전의 성리학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토지제도, 농업 생산, 상공업, 과학기술, 행정개혁 등 매우 폭넓은 분야에 걸쳐 실제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려 했습니다.

 

중농주의 실학의 결정판인 정약용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이자, 중농주의 실학의 정점에 선 인물입니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했고, 다양한 개혁안을 이론화했으며, 이후 유배지에서도 50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습니다. 정약용의 대표적인 사상은 토지제도 개혁안에 있습니다. 그는 당시 양반 지주의 토지 독점과 농민의 피폐한 삶을 문제 삼고, 여전제(공동경작 공동분배)와 정전제(토지를 9등분하여 공동경작, 1칸은 공공이 사용)를 제안했습니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사회적 재분배와 협동농업 모델에 해당합니다. 비록 현실 정치에서는 채택되지 못했지만, 조선 후기 경제 불균형 문제를 통찰한 선구적 제안이었습니다. 정약용의 또 다른 대표 저서 목민심서는 지방관(목민관)의 자세와 역할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실용 행정 지침서입니다. 이 책에서는 부정부패 근절, 청렴한 관리상, 백성을 중심으로 한 행정 철학이 강조되며, 조선 후기 지방관료의 도덕 기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에서 형벌 제도, 정치 제도의 개혁 방향까지 제시해 정치, 경제, 법률 전 분야에 걸쳐 근대적 개혁안을 구상한 실학자였습니다. 정약용은 성리학적 이상 세계보다 현실의 문제 해결에 집중한 지식인이었으며, 자신의 신분적 제약(서얼)과 천주교와의 연계, 유배 등 수많은 사회적 억압 속에서도 학문적 성취를 통해 체제 개선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조선 말기 개화사상, 나아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상주의 실학의 선구자 박지원과 북학파

한편 정약용과는 다른 방향에서 실학을 발전시킨 학파도 있었습니다. 바로 북학파입니다. 북학파는 중국 청나라의 실용 문물을 배우자는 입장을 바탕으로, 상공업 진흥, 해외 교역 확대, 서민 경제 활성화를 주장한 중상주의 실학자 그룹입니다. 그 중심에는 박지원(1737~1805)이 있습니다. 박지원은 1780년 사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자신의 견문을 담은 열하일기를 집필합니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청나라의 개방된 문화, 기술 문물, 상업 경제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조선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통렬하게 비판한 문헌입니다. 그는 청나라를 오랑캐로만 여기던 당시 유학자들과 달리,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타 문명과의 교류를 주장했고, 특히 화폐 유통, 선박 기술, 인쇄술 등을 조선에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박지원은 농업 중심의 경제관에서 벗어나, 상업과 수공업의 진흥이 국가 경제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폐쇄적 농본주의가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며, 상품 유통과 해외 무역 확대야말로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에 형성된 신흥 상인 계층과 서민 경제층의 성장 흐름을 반영한 매우 현실적이고 진보적인 주장으로, 경제 다변화를 위한 선구적 제안이기도 했습니다. 북학파의 사상은 당시 주류 성리학계와 보수 양반 사회에서 심한 반발을 불렀으며, 현실 정치에 즉각 반영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조선 말기 개화사상, 나아가 19세기 서구 문물 수용과 경제 근대화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박지원의 제자였던 박제가, 유득공 등도 북학파 실학자들로 활발한 저술과 활동을 이어갔으며, 실학은 점차 사회 전반에 퍼지는 사상적 물결로 성장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불만이 아닌,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실천이자 구체적 개혁 시도였습니다. 정약용은 백성을 위한 정치, 토지 개혁, 행정 혁신을 설계한 중농주의 실학자였고, 박지원은 상업 활성화와 기술 도입을 통해 민생 경제를 살리려 한 중상주의 선구자였습니다. 비록 그들의 사상이 당대에 바로 실현되진 못했지만, 근대사로 이어지는 사상적 징검다리 역할을 했고, 이후 개화파·자강파·실용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지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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